서로의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서로의 취약함을 드러내고도 안전하다고 느끼고 서로에게서 위로받는 경험이 인간을 살게 한다고, 그렇게 한강 작가님이 말한다고 생각했다.
다친 동물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공격적으로 행동하고, 취약함, 즉 자신의 상처를 다른 존재에게 드러내는 건 죽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인류 문명의 시작은 뼈가 부러졌다가 붙었던 흔적이 있는 고대 인류의 유골이다. 그러니까, 나는 희망을 가지고 싶다고 아직 생각한다.
세상은 고통과 슬픔, 상실, 폭력이 가득한 동시에 아름답다. 내가 사랑하고 싶어지는 것들이 그것들과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영원히 내 자리가 어디인지 모른 채 빙빙 돈다는 것일수도 있다. 어디에도 발을 딛지 못하고 중력을 잃은 채로 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들이 떠날 때마다 특히 그럴 것이다.
<새벽의 모든>이 당장 떠오르는 예시인데, 서로의 연한 부분을 보여주는 인물들이 사랑스럽다. 서로에게서 안전함을 느끼고 그로 인해 계속 살아갈 힘을 얻는 것. 특별히 비장하지 않은 채로 그저 살아가는 것.
얼마전에 친구와 오랜만에 안부를 주고 받았다. 나는 내가 듣고 싶었는지도 몰랐던 말을 친구의 입을 통해 들었다. 내가 스스로에게 지금까지 해주지 않았던, 하지만 알고보니 무엇보다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혼자서 아시안인 팀에서 영어로 일하는 너를 보면서 멋지다고 생각했어. 돈도 잘 벌어봤고 멋지게 일도 해봤으니 뭐든 할 수 있을거야. 뭐 이런 말이었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정확히는 통화를 다 마치고, 덤덤히 씻고, 덤덤히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엉엉 울었다. 귀신들이 누군가 자신의 사연을 알아주고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면 성불하는 것처럼, 그런 기분으로 엉엉 울었다. 울었던 이유에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요인이 있다. 도대체 내가 개운하려고 글을 쓰면서도 이것의 효용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를 때가 많았다. 그런데 아주 의외의 곳에서, 아주 의외의 방식으로, 내 글이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얘길 친구에게 들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내가 사랑할 수 없었던 내 모든 시간을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무용하지 않았다. 어딘가에 닿았다. 자려고 누웠다가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콸콸 났다. 상을 받기 위해 글을 쓰지 않고 홀로 글을 쓰는 시간들이 치유받는 경험이었다.
사랑의 힘을 믿고 싶다고 부처님께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사랑이 정확히 뭔지 모르지만 일단 빌었다. 내가 사랑이라고 더듬어보았던 것들을 떠올리며 빌었다. 사랑하던 많은 존재들이 죽었고 세상의 사랑 노래들은 시시했다. 올해는 유독 뭘 해도 안되는 해였다.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노력을 그만두고 기대도 그만두고 그냥 존재하기만 하자. 그렇게 생각한 12월에 나의 취약한 면을 드러내고 위로받았다. 이것만으로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잠이 오지 않아서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을 반복해서 읽는다. 결국에는 사랑이다. 사랑이 뭐냐고,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해도 마음으로는 그것을 만져볼 수 있다. 사랑이 뭔지 말하기 위해서는 끝도 없이 문장들을 적어야만 하고, 친구가 내게 몇 가지 일화들을 들려주어야 하고, 생전 개의 코골이 소리를 들어야만 하고, 잠이 오지 않는 밤에 갑자기 일어나 앉아서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어야만 한다.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깊숙한 곳에서 느끼며 한밤에 엉엉 울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