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비스스ㅅ소 pulvissso

이야기가 될 수 없는 이야기만이 이야기해야 하는 이야기(draft)

"이야기가 한 갈래로 정리되지 않는 것 같아요."

살면서 이야기를 썼을 때 들은 피드백 중에서 계속해서 변하지 않는 말 중에 하나다. 같은 이야기도 어떤 사람은 한 갈래로 정리되지 않아서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한 갈래로 정리되지 않아서 아쉽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역시 정리되지 않는 편이 맞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글을 읽고 피드백을 하다보면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뚜렷한 사람들이 있다. 하나의 메시지가 있고, 이야기 속의 인물과 각종 요소들은 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쌓아 올려진다. 그런 이야기들은 완성도와 만족감을 준다. 그 만족감은 형태가 파악이 가능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마주했을 때의 만족감이다. 사람들은 보통 파악할 수 없거나 미지의 것으로 남거나, 불분명한 지점이 있는 이야기가 있을 때 불편함을 느낀다. 이런 분명한 이야기는 장점도 분명하다. 하지만 확실한건 내 취향은 아니다. 완벽한 이야기는 없고 각기 장점과 단점을 가진 이야기들이 있다고 했을 때, 내가 추구하고 싶은 이야기는 완벽과 완성이 불가능한 이야기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일단 시작되는 이야기다.

배우들 라인업이 엄청난 모 OTT 서비스의 새 드라마를 봤다. 대사를 잘 썼고 재밌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언가 찜찜했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근현대사부터 훑어가면서 가족의 역사를 다루지만, 중요한 것을 빼먹었다. 4.3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제주도의 역사가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남기는 드라마였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드라마를 많이 썼다고 하기에 작가의 전작도 찾아봤다. 감초 역할로 유명한 배우들이 감칠맛 나게 쓰인 대사를 살려서 인물들이 생생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이 작가의 작품은 대체 왜 매번 박복한 운명의 여성 인물 옆에 우직한 남성 인물을 붙여주는걸까? 이런 의문을 느꼈다. 소위 '직업 여성'이라고 비하당하는 여성 인물이 여자 주인공 대신에 죽음을 맞이하고, 노력은 보상받고, 주인공의 아들은 보란듯이 성공한다. 이런 이야기가 주는 만족감은 분명히 있다. 누가 찜찜한 이야기를 굳이 지치고 피곤한 날에 보고 싶을까. 하지만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말끔한, 이야기가 될 수 있는 부분만 남겨낸 이야기가 내 취향이 아니란걸 다시 확인했다.

나름대로 유명한 작가가 쓴 대본인데도 4.3에 대한 언급이 빠진 것은, 오히려 자본이 많이 투입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선지 혼란스러운 부분이었다. 사람들을 울게 만드는 이야기지만 그게 꼭 좋은 의미인지 모르겠다. 제목에 동백이 들어가는 작가의 전작 마지막화를 보며 "이번 생이 너무 피곤했다."고 말하는 인물의 대사에 나도 마음이 아렸지만, 그건 거의 전적으로 배우의 몫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 민속/무속/종교학 교양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학기말에 시험 대신 배운 것을 토대로 작품 구상을 해서 제출하는 수업이었다. 제주 해녀들의 항일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자연스럽게 제주도 신화를 파서 두 해녀가 등장하는 판타지를 구상했다. 조선시대부터 근대, 현대를 지나는 이야기를 PPT로 발표하며 선생님의 호평을 들었다. 기고만장해진 나는 이걸로 졸업 작품을 써야지 다짐했... 으나....

이야기의 세부를 정하면서 4.3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다룰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제주도가 겪은 착취와 고난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유일하게 존경하는 전공 선생님께 이야기를 들고 가서 제주도 역사를 훑는 이야기를 쓰는데 4.3을 빼먹는건 비겁한 것 같아요, 라고 질문인지 뭔지 알 수 없는 하소연을 했다. 제주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구술사를 훑어보고 다큐멘터리를 보면 볼수록 내가 이 이야기를 다룰 깜냥이 아직 아니라는 생각만 올라왔다. 4.3은 내가 쓰고자 하는 이야기 속 일대기 중에 한 부분이지만 제대로 하지 않을거라면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느꼈다. 결국 작품을 쓰기도 전에 자료 조사에 파묻혀 영영 보류하게 되었다. (구술사라는 분야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가 되긴 했지만 어떤 '결과'를 내지 못한 채)

제주도에 대해 다루면서 제법 비겁한 태도를 취하는 이야기들을 보면서 4.3이 이야기가 될 수 없는 이야기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에서 4.3 당시의 기억을 말하는 사람들, 여성들을 보았다. 어느 기억은 새파랗게 선명하고, 어느 기억은 희미해져버렸다. 치매에 걸렸지만 그때의 기억만은 선명한 사람도 있다. 알아듣기 편하거나 정제되지 않은 말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는 말들이, 이야기가 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다시 느꼈다.

물론 픽션의 영역에서 이걸 다소 정제해서 다루는건 또 다른 것이지만, 그래도 언젠가 이야기를 다시 쓴다면 비겁해지고 싶지는 않다. 그 방식을 찾고 싶다.

이야기를 쓴다면 반드시 엇나갈 수 밖에 없고 만족스러울 수 없고 정리될 수 없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글을 쓰거나 이야기를 쓴다는 건 내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가 아니라 모르기 때문이다. 쓰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방향을 찾기도 한다. 속에 있는 것들을 다 뱉어냈을 때에 겨우 이것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쓰기도 전에 뭔갈 알고 있다면 그건 그냥 내 일기장에서 몇가지 문장으로 쓰이고 만다.

서사에 반대한다. 라는 문장만큼 요새 본 문장 중에 맘에 드는 문장이 없다. 기승전결이나 서사 구조가 어떤 의미에서 폭력적인지 절절히 다루는 책들을 읽으며 이번 생에 글이나 이야기로 (먹고 살만큼) 돈을 벌기엔 다소 글렀구나 느낀다. 어느 시점부터 영화제에서 재밌게 본 작품들, 의미있었다고 생각한 작품들이 극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인건 아마 이런 이유였나보다. 물론 다큐멘터리도 편집을 거치고,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덜 보여줄지 결정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만드는 이가 없는 걸 재료로 만들 수는 없다.

좋아하는 작품들과 쓰고 싶은 글이 일치하니 그래도 다행이다. 같은 글을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줬을 때 반응이 갈리는 것을 보며 '아, 이쪽에서 좌판을 깔면 되겠구나.'하고 생각했다. 모호한 것일수록 이야기가 더 필요하다. 몇 마디 말로는 도무지 전할 수 없기 때문에 모호할수록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분열되고, 말하려고 할 때마다 실패하고, 비선형적으로 흐르는 이야기 쓰기를 한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오싹하다. 흠이 없는 이야기는 없다. 흠이 매력이 되도록 만들면 된다. 라는 말을 염불처럼 외우며 언젠가는 쓰겠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