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좀 힘이 든다 싶을 때, 별로 힘을 내고 싶지 않을 때, 강인한 스스로에 취하는 대신에 그냥 다 내려두고 좀 취약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누군가를 만나는 대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후회할 만한 결정을 내리지 않고 마음의 요양을 보내려고 한다.
살면서 딱 두 번, 이런 시기에 신점을 본 적이 있다. 한 번은 코로나로 지금까지 해오던 것들이 몽땅 무의미하게 느껴졌을 때 그리고 회사의 사업 철수로 세워둔 인생 계획이 크게 어긋났을 때였다. 인생은 예측 불가고 그렇기에 생은 의미를 가진다는 아주아주 유명한 만화 명대사가 있지만... 좋아하는 대사지만... 만화 주인공이 아닌 나에게 직접 닥쳐오면 역시나 간사한 사람 마음은 괴로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내가 신점을 봤던 두 무속인 분은 나이대도, 지역도 다른 분들이었다. 부채를 펼치고 방울을 흔들고, 뭐랄까, 나만을 위한 1인 퍼포먼스를 보는 느낌이 조금 들었다. 인생에 한두 번쯤이라면 오로지 나만을 위한 맞춤 공연을 보고 싶을 수도 있지. 아무튼, 한 분은 이제는 돌아가신 어느 만신의 직속 제자 분이셨고 어느 한 분은 신을 받은 지 오래되지 않은 애동 제자셨다. 두 분 다 간판이 없었고, 건너 건너 우연히 존재를 알게 된 분들이라 가봐야지 싶었다.
재밌는 사실은, 두 분이 공통으로 해주신 말씀이 있었다. 바로 내 뒤에 인자한 웃음을 짓고 계신 할머니가 있다고, 할머니가 도와주신다고, 조상님이신가? 도움을 주신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를 일찍 사별한 할머니 안 계세요? 이렇게 물어보셨었다.
만약에 그냥 할머니였다면 그렇구나 하고 넘겼을텐데. 내가 아는 나의 할머니 중에는 일찍 할아버지와 사별하신 분이 없다. 할아버지들은, 내가 얼굴을 보지 못한 할아버지조차 머리가 백발이 되시고 70~80이 넘어서 돌아가셨다. 게다가 할머니 한 분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절에 가서 본인의 극락왕생을 빈다고 하면 아마 펄쩍 뛸 분이다. 게다가 날 안 좋아하기도 하셨고.
이런 미스테리를 품고, 대체 어느 할머니이신지 알 수 없는, 고조 증조까지 올라가야 누가 나오시는 건지 알 수 없는, 아니 그 이전에 믿거나 말거나인 할머니의 존재가 가끔 신경 쓰일 때가 있다. 이처럼 취약해지고 싶을 때다. 할머니, 힘 좀 더 써주세요, 네? 이런 불효 손주 같은 말이나 속으로 되뇌게 된다.
기운 좋은 절에 가서 할머니의 극락왕생을 빌어드리라는 조언이 문득 생각난 것은 최근이다. 아무 종교도 안 믿지만 불교는 일단 절이 마음 편안하고, 향냄새를 좋아하고, 일견 사회적 소수자에 열린 듯한 모습을 보여서 괜찮았다. 여성 보살님들의 공양간 노동이나 때때로 남자 스님들이 하는 성차별적인 발언들은 뒤로 하고 일단.
산책할 겸 추천받은 절로 향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큰 절이라 고른 곳인데, 무슨 대기업 총수들이 방문하는 곳이라고 했다. 실제로 가보니 정장을 빼입은 사람들이 열심히 절을 올리고 있었다. 소원을 적은 쪽지들에는 부동산이 잘 되게 해달라, 뭐 그런 말들도 보였다. 사회적 소수자들 눈에서 눈물 나게 하는 사람들이 여기 와서 자기 잘 되게 해달라고 비는 거 아닌가? 어느새 삐딱한 시선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종무소에서 만원짜리 소원초를 샀다. 생년월일을 적고 발원란에 뭘 적을까 고민했다. 굳이 언어화하지 않아도 그냥 찰떡같이 알아서 해주시면 안 될까요. 부처님 오마카세. 이런 생각을 하면 너무 불경하려나. 사실 저는 제가 뭘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모르겠어요. 그리고 인생을 살다 보면 뭐 하나가 이뤄져서 기뻐하는 동안 다른 거 하나를 뺏어가시더라고요. 그래서 뭘 빌기가 너무 무서워요.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그냥 아무것도 안 뺏고 잘 들어주시면 안될까요? 일단은 이렇게 적는다. 행복. 건강. 극락왕생.
대웅전 안에 들어가서 초를 붙이려고 기웃거리는데 라이터가 보이지 않는다. 열심히 절하시던 중인 중년 여자분이 슬그머니 다가오셔서 라이터를 건네신다. 초를 붙이고 초가 잘 타나 멀뚱히 지켜봤다. 아까 그 분이 다시 오셔서 다소 다그치는 소리로 속삭이신다. "발원을 했으면 삼배를 해야지!"
삼배, 그러니까 절을 하려고 보니까 이번에는 어디서 방석을 가져와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까 그분의 따가운 시선을 등 뒤로 느끼며 그냥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한 번에 하나씩 빈다. 총 세 번 고개를 숙인다. 그동안 랩처럼 빠르게 마음 속으로 읊조린다. 제가 마음 편히 있을 자리를 찾고 갈 수 있게 해주세요. 제가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싶어요. 마음속에 사랑이 마르지 않게 해주세요. 사랑의 힘을 믿을 수 있게 해주세요. 지난 여름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저의 개가 좋은 곳으로 가게 해주세요. 그리고 누구신지는 모르겠는 할머님, 극락왕생하시고 절 도와주세요.
여기까지 마치고 나니 부처님도 너무나 피곤하실 것 같다. 다 마음의 문제인데, 그냥 눈 질끈 감고 열심히 하다 보면 뭐라도 될 텐데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자식의 수능 대박을 기원하거나 부동산이 잘 되기를 바라거나 아무튼, 왜 나는 소원조차도 이렇게 정리되지 않고 모호한 것일까. 구체적인 소원을 빌면 어쩐지 스스로가 싫어지나?
만원과 삼배. 부처님에게 소원을 비는 절차는 굉장히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고 복잡해서 끼지 말아야 할 곳에 끼어 들어갔다는 인상을 받았다. 불교 신자도 아니면서 괜히 기웃거린 느낌이다. 소원 빌기를 마치고 공양간에 가서 밥을 먹고 먹은 접시를 설거지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마음은 답답한데 소원을 빌려고 하면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없는 답답한 나 자신을 돌아보며 퀭한 눈을 비빈다.
예전에 제주도에 놀러 가서 제주도 여신님께 소원을 빌 때는 참 마음이 편했던 것 같은데. 이런저런 절차도 없고. 그리고 소원을 마쳤을 때 불어오는 바람이 들어주겠다고 답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소원은 아주 괴이한 방식으로 이뤄져서 차마 감사하다고는 말 할 수 없는 배은망덕한 상황이다.) 정장을 빼입은 사람들이 기도하러 오는 큰 절보다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업무 메일이나 서류를 작성할 때처럼 부처님께 인사말을 남긴다. 저는 그저 아는 것 없는 한낱 중생일 뿐입니다. 폐를 끼쳤더라도 그저 가엾이 여기어 넘겨주세요. 감사합니다. 중생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