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경 작성)
작년 12월, 내가 속한 회사의 한국 지사가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이제 겨우 2년차, 앞으로 여기서 1년 이상은 더 버티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는데. 작년 초의 정리 해고를 무사히 넘기고 여기서 경력을 다듬어가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하지만 무사히는 무사히가 아니다. 약간의 죄책감과 안도감, 짙은 스트레스를 남겼다. 회사는 3일간 정리해고 대상자들에게 개인 연락을 취했다. 모든 직원들은 3일 동안 불안에 떨며 업무를 하는 둥 마는 둥 초조하게 보냈다. 이후로는 모두가 예전 같지 않았다.)
한 편으로는, 회사에 다니면서 적당한 불행과 적당한 불편을 감수하며 이렇게 알 수 없이 시간을 죽여 버리게 될까봐 두렵기도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오면서도 내 발로 나가기에는 후한 월급이 너무나 달콤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서 0.1초 정도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상상을 한 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회사를 다니면서는 창작자로서의 정체성을 놓칠까봐, 혹은 놓쳐서 두려워했다면 이번에는 회사원이라는 정체성을 놓칠까봐 두려워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내가 담당한 직무는 가능성이 있다고 들어서 다른 나라로 인사 발령을 신청했다. 아시아 담당이던 싱가포르의 HR 직원은 지난 정리 해고 때 해고당해서 영국으로부터 답신을 기다려야만 했다. 영국과 우리나라의 시차는 9시간이었고, 우리는 미래인과 과거인처럼 소통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알아보겠다고 3일 동안 묵묵부답이다가, 마지막 순간에 다른 나라의 여권이나 비자가 없느냐고, 회사가 비자 지원을 해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답했다.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가능성과 선택지가 갑자기 늘어나서 속이 미식거렸다. 워홀을 갈지, 유학을 갈지, 아니면 다시 취업을 할지, 아니면 아주 긴긴 방학을 보내면서 쉴지. 지난번 출장이 마지막일줄 알았다면 초콜릿 좀 더 사고 휴가도 왕창 내서 근처 다른 나라도 더 오래오래 여행할걸. 왜 내년에도 올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월급 받을 때 돈 좀 펑펑 써볼걸. 많이 따지지 말고 그냥 아무 지상층으로 이사 갈걸. 여전히 반지하다. 여전히 창밖으로는 하늘을 볼 수 없다.
회사에서 퇴사 절차를 위해 서명하라고 보낸 문서를 열어봤다. 영어로 먼저 쓰이고 그 이후에 한국어로 번역된 것처럼 보이는 문서는 채찍과 당근이 동시에 담긴, 비싼 돈을 지불하고 변호사들의 검수를 통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문서였다. 회사의 책임을 회피하고 직원 개개인이 현 사태를 따져 묻지 않겠다고 서명하는 각서와도 같았다. 서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항목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면서 재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공포 영화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었거나 괴물에게 끌려가는 인물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함께한 시간 동안 많은 걸 배웠고, 지금까지의 기회에 감사하며 기타등등. 품위를 지키고 싶다. 허영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아무 대표성도 없지만 마지막까지 차분하고 이성적이며 동료들을 배려하는 한국인으로 보이고 싶다.
내 인생에 장르가 있다면 무엇일까. 일단 로맨스가 되기는 글러먹은 것 같고, 그렇다고 코미디나 드라마라고 하기에도 좀 애매하고. 미스터리나 호러는 싫고. 일단 고른 장르는 다크 코미디였다. 구린 일들이 생기더라도 코미디로 헤쳐 나가보겠다는 패기가 담긴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러나.... 못해먹겠다. 내 안의 코미디는 오래전에 메말라버린 기분이다. 전체 관람가인 가족 친화적인 코미디 장르는 안될까? 그렇다면 이후에 날 찾아올 일들은 얼렁뚱땅 행운일 텐데. 걱정할 필요도 없이 앞뒤 꽉 막힌 입체감 없는 행복이 찾아오기를 막연히 바라게 된다.
아침을 먹으면서 유명 게임 엔진 회사와 유명 언어 학습 어플이 전 세계적으로 직원 500명 이상을 해고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정리 해고는 끝이 나질 않았다. 심란한 마음으로 업무용 노트북을 여니 동료들이 심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우리 회사, 내일 또 정리해고가 있을 예정이라는 기사가 떴어.’
그리고 다음날, 내가 속한 팀에서 4명이 해고당했다. 어차피 내가 회사에서 나간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어서 마음을 졸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잘 준비를 마치고 누워서까지 휴대폰으로 회사 슬랙 채널을 봤다. 내일은 오늘 같지 않겠지. 어제도 오늘 같지 않았으니까. 멍하게 스크롤을 내리면서 생각했다.
회사 슬랙 채널이나 링크드인에서는 회사에서 해고당한 엔지니어에게 도움을 주거나 채용을 진행하겠다는 메시지가 돌아다닌다. 그럼 엔지니어가 아닌 사람들은?
금요일에 살아남은 리더 중 한 사람이 모두 고생했다며 긴 휴일을 잘 보내고 오라고 말한다. 다음 주 월요일은 미국의 공휴일이고, 이곳에는 미국에 살지도, 미국인도 아닌 사람이 한 가득이다.
해고당한 사람들이 남기는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마지막 말들이 회사 전체 채널을 가득 채운다.
“나 올해 43인 여자인데, 나이 많은 거 숨기고 어디로 취업해야할지 조언 좀 해줘.”
“회사는 이미 오래전에 전성기의 모습을 잃었어. 너희도 빨리 탈출해.”
“한국은 시장 철수 발표라도 했지, 대만은 소리 소문 없이 닫았어.”
아침마다 링크드인을 훑어본다. 사람들이 일련의 정리해고 이후에 많은 말을 쏟아냈다.
“하반기로 갈수록 취직과 이직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더 많은 회사들이 정리해고를 계획 중이거든요. 당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쩌고저쩌고.”
“이번 정리해고의 물결은 이천 년대 초반을 떠오르게 합니다. 저 역시도 18개월 동안 무직으로 지냈었죠...... 그때의 경험은......”
“회사에 무조건 붙어있으세요. 때가 좋지 않습니다.”
나의 실질적인 근무는 2월까지라고 통보 받았다. 2월까지의 모호한 기간이 내 앞에 남았다. 팀원들과 상의해서 하루에 3~4시간만 낮에 일하기로 결정했다.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두 달 뒤, 라는 글자가 화면에 뜨며 빠르게 지나갔겠지만 이건 현실이다. 현실은 이야기가 되지 못하는 부분까지 견뎌야 하는 법이다.
업무 협력을 하는 타 부서에서는 답장이 3일 동안 없다. 별 생각 없이 회사 전체 채널에서 사람들의 슬랙 계정을 클릭해본다. 회사가 삭제한, 해고당한 사람의 슬랙 계정은 프로필 사진 밑에 Deactivated Account라고 뜬다. 아는 이름들을 하나씩 떨리는 마음으로 클릭한다. Deactivated Account, Deactivated Account, Deactivated Account, Deactivated Account, Deactivated Account, Deactivated Account, Deactivated Account, Deactivated Account, Deactivated Account, Deactivated Account.
업무 상 자주 연락을 주고받던 사람. 한국 서비스 종료에 위로의 말을 남겼던 사람. 사내 퀴어 모임 대표. 나의 매니저. 팀의 창립자 중 한 명. 딸의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하와이에 간다던 단정한 인상의 HR 대표(이 사람의 인생을 훔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전부 사라져버렸다. 마치 자연재해처럼, 뚜렷한 기준을 알 수 없이 35%를 없애버리겠다는 거대한 거인의 손에 사람들이 휩쓸려서 사라져버렸다.
인원이 줄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우연인지 오늘따라 자꾸 버그가 발생한다. 같은 시간대에 업무를 하는 동료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온다.
‘안 좋은 타이밍에 계속 문제가 생기네.’
‘그러게. 꼭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다. 초반 말고, 후반에 나오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가냘픈 철제 다리 두 개로 기우뚱 기우뚱 움직이며 벼랑 같은 곳을 위태롭게 걸어 다니는 널빤지, 그 위에 살아남은 몇 사람이 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동료가 불 타는 집 안에서 동공이 확장된 채 “I’m fine.”이라고 말하며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개의 영상을 보낸다. 나는 온 몸에 불이 붙은 채로 비보잉 댄스를 하는 사람의 영상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