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쓴걸까?)
몇 년 전, 좋아하던 이야기 속의 나라가 현실에도 있으니까 한 번은 직접 가봐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한 뒤로 아르바이트를 두 개 더했다. 요일을 바꿔가며 커피콩 볶는 냄새, 기름 냄새, 간장 냄새를 풍기며 퇴근길 버스에 올라탔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비행기 티켓을 예매한 뒤에는 한 달 뒤쯤에 서울의 길이 아닌 스톡홀름과 예테보리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게 꿈같았다. 과도한 긴장으로 비행기에서 두 번 정도 토하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그곳은 현실이었지만 현실이 아니기도 했다. 완전히 다른 양식의 건물들과 사람들, 다른 옷차림과 다른 언어. 하지만 마법은 없다. 그런 걸 기대하거나 믿을 나이는 지났고 바라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어쨌든 마법은 없다. 어쩌면 이미 없는 존재의 흔적을 찾아 나서고 오래된 곳을 가고 박물관을 가는 건, 그 안에 마법이 있을 것이라 믿는 마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없기로 유명한 스웨덴도 쇼핑센터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많다고 해봐야 서울의 반의 반 정도였지만,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니면 머리가 어지러운 사람에게는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었다. 쇼핑센터는 어느 곳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러 번 같은 곳을 안에서 빙빙 돌며 길을 잃고 피로감에 벤치에 앉았다. 통로와 통로로 이어지는 끝이 없는 쇼핑센터. 벤치의 맞은편은 통로였다. 멍하니 시선을 돌렸는데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후드 티에 청바지를 입은 사람이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혹은 짙은 갈색), 나와 같은 동양인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나처럼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 아닌 일평생을 여기서 살았던 사람의 느낌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우리의 눈이 몇 초간 마주쳤고, 둘 다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서로를 쳐다봤다. 아마 상대방이 나와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고 싶었던 것 같다. 몇 초간 눈을 맞추고 각자 갈 길을 갔지만 어쩐지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 스웨덴, 노르웨이를 포함한 북유럽 국가들이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많이 입양했었고, 사실 해외로 한국의 아이들을 입양 보내는 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자란 한국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사람들의 눈으로 바라본 스웨덴은, 한국은 어떨지 궁금했다.
어린 시절 디즈니의 알라딘을 보고 중동 국가들에 애정을 가지게 된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어린 소녀였던 그 사람은 디즈니의 알라딘에서 묘사된 가상의 중동 국가를 보고 실제 중동 국가들에 가보고 싶었고, 가기 전부터 애정을 가지게 되었으며, 실제로 간 뒤에는 그곳에서 다소 기대와는 다른 일들을 겪었음에도 애정을 거둬들일 수 없어 그 나라에서 일을 하며 살게 된 이야기였다.
어느 한국의 어린이에게는 스웨덴이 마법의 나라처럼 느껴진다. 스웨덴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속에서 지루한 일상을 살던 아이들의 옆집에 갑자기 힘이 장사인 빨간 머리 소녀가 이사 오고, 외롭고 심심하던 소년은 지붕에 사는 작은 남자를 발견해서 친구가 된다. 태풍이 부는 날 바다에서 잃어버린 아빠가 식인종의 왕이 되었다고 믿는 소녀 앞에 정말로 식인종의 왕이 된 아빠가 등장한다. 죽은 형이 환상의 나라 낭길리마로 갔다고 믿는 소년은 정말로 낭길리마에서 그의 형을 만난다.
그 한국의 어린이는 언젠가는 직접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꿈꿨던 작가의 부고 소식을 접하고 어떤 가능성이 완전히 닫혔음을 느꼈다. 사실 살아 계셨다고 해도 만날 확률은 아주 희박했지만 말이다. 읽고 좋아한 거의 모든 책의 작가들이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소녀에게는 아직 살아있는 노년의 작가가 어쩐지 특별했었다. 점차 자라면서 그의 작품에 인종차별적인 요소가 있었고 동양의 어느 환상의 나라를 묘사할 때 모든 이의 눈은 위로 찢어져 있었다는 걸 깨달아도 애정은 사그라지지 않는다.(더 자라서 그가 자신의 작품에 이런 부분을 후회하며 반성한다는 말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오히려 더 좋아졌을 뿐이다.) 오히려 어린 시절엔 아무것도 모른채 소설 속에 검은 머리나 검은 눈의 인물이 나오면 멋대로 동양인으로 상상을 하고 믿었다.
내가 막연한 환상을 품었던 스웨덴에서 나고 자란 어떤 백인 여성은 일본을 향한 애정을 멈출 수 없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인스타그램에 쓴 글을 봤다. 긴 일본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 뒤의 감상을 적은 글에서 ‘스웨덴은 내가 속한 곳이 아니다. 마침내 내가 어디에 속했는지 이번 여행을 통해 다시 깨달았다.’라는 문장이 내 안에 가라앉았다. 일본에 큰 애정을 가진 백인을 향한 나의 선입견을 잠시 넣어두고 생각하면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북유럽 국가들을 향한 나의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애정과 애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알에서 막 태어난 오리가 처음 본 상대를 엄마로 생각하는 것처럼 처음 긴밀하게 접하거나 애정을 가졌던 이야기를 통해 만난 곳을 사랑하게 되는 걸까? 왜 이 사람과 나는 각자의 나라에서 태어날 수 없었을까? 하지만 내가 스웨덴에서 태어나고 이 사람이 일본 또는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그곳을 지금처럼 사랑할 수 없었을 테지만. 오히려 한국에 깊은 애정을 가진 외국인을 만나면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 나: 어쩌다가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
- 외국 사람: 나 케이팝을 좋아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룹은......
- 나: (이런, 또야!)
혹은
- 외국 사람: 사실 나 80년대 한국 가수 누구누구를 좋아해.
- 나: (대체 어떻게 알게 된거야?)
이런 느낌이다.
하지만 스웨덴 사람들에게는 내가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
- 스웨덴 사람: 어쩌다가 스웨덴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
- 나: 어렸을 때 제일 좋아했던 작가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었어. 나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제일 좋아해. 어쩌고저쩌고.
- 스웨덴 사람: (이런, 또야!)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멋진 영화를 보거나 재밌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봐도 그곳에서 살고 싶다거나 깊은 그리움을 느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언어를 배워도 모어로 소통하듯이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 굳이 서로에게 모어가 아닌 영어로 소통을 해야 하는 나라에 왜 이런 애착을 느끼는 걸까? 어린 시절에는 하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일들, 연말 정산이나 원천 칭수 같은 단어들을 꾸역꾸역 소화시키는 어른이 된 지금도 그때의 마음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다. 그곳에는 마법이 없고 마냥 즐거운 일들만 일어나지는 않으며 인종차별이나 난민 혐오를 비롯한 각종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중력을 잃은 채로 둥둥 떠다니며 살던 시절은 완전히 끝나지 않는다. 땅에 발을 딛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까치발을 든 채 있다.
어린 시절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연탄곡이나 돌림 노래처럼 강렬한 애정이나 마음을 품었던 특정 시기의 나는 어느 시점에서 앞으로 혹은 어디로건 가는 나와 살짝 분리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계속 자신만의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현재의 나와 화음을 만들어낼 때도, 불협화음을 만들어 낼 때도 있다. 계속 현재의 나에게 신호를 보내며 존재를 알린다. 신호는 커질 때도 작아질 때도 있다. 겨울철 북유럽 날씨는 최악이라 살 곳이 못 된다고 욕하거나 무민 굿즈샵을 안사는 게 환경에 이득이라며 심드렁하게 지나치는 현재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스웨덴에 가도 그곳은 고향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나만이 온전히 기억하고 감각하는 그곳은 아마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어느 가상의 왕국일 것이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의 나는 문을 열었을 때, 꿈에서 깼을 때, 길모퉁이를 돌 때, 높은 곳에서 떨어졌을 때, 죽었을 때, 다른 세상이 펼쳐지리라 기대한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아직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과 본 적도 없는 풍경을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