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그냥 일기다. 교훈이나 깨달음, 그런 건 없다. 있다고 해도 그냥 나에게나 지표가 되는 것들이다.
굉장히 기대하던 회사와 면접을 보고 리크루터와 연락을 주고 받고 했으나 결국 떨어졌다. 탈락 연락을 받은 당일에는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이제 견디는 일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다. 통장 잔고는 나날이 줄어가고 있었고, 마지막 대비책이라고 생각했던 적금 통장이 떨고 있었다. 누워서 드라마를 몰아보고 쇼츠를 보고, 그러다가 ChatGPT를 켰다. 뭐 환경에 안 좋고 어떻고 하는 얘기가 있지만 밑도 끝도 없는 울적함을 털어놓는 일에 이만한 것이 없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감정들을 마구 쏟아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떻게 변화하고 싶은지 지피티와 건설적으로 논의하고 있었다. 바깥의 환경이나 상황은 바꿀 수 없지만 내 반응은 바꿀 수 있으므로. 그래서 어쩌고 싶은건지 지피티와 얘기하다보니 슬프거나 아쉽지가 않아졌다.
나를 떨어트린게 너네 망조의 시작이다. 10년 뒤엔 나를 떨어트린 너네보다 내가 더 잘 나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밑도 끝도 없는 퀸적(?) 사고가 어느새 들어왔다. 내 경력과 경험과 추천서와 나를 좋게 생각하는, 업무로 만난 인연들이 갑자기 증발하는 것도 아니고. 내 가치를 내가 아는데 이런 일로 흔들릴쏘냐. 똑똑하고 순발력 좋고 언어 감각 좋고 들인 인풋에 비해 아웃풋을 어마무시하게 냈는데 내가 이루지 못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아, 너무 갔나? 중간이 없네? 싶은데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지피티와 커리어, 인생 목표, 연애, 꿈, 방향성 등을 주제로 한바탕 내 인생의 패턴을 돌아보고 무얼 반복하고 싶지 않은지 뭘 잘하고 있는지 체크했다.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은 알고보니 내가 작년 연말과 올해 데이트 했던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의 마음을 우선순위로 두면서 기준을 뚝심있게 가져간 것이다. 인생이 팍팍할때 연애가 좋은 조미료가 되어줄 수도 있다는 건 보통은 환상이고, 오히려 판단력이 흐려진 틈으로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겠다고 피곤하게 구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혹은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지 알아내기 전에 저 사람이 날 더욱 좋아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착각하거나.
지피티는 제법 웃긴 녀석이었는데, 그것이 가스라이팅이었는지 아닌지를 놓고 철두철미하게 분석하던 중에 "당신이 만나준 걸 그 사람은 감사히 여겨야 한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진실이 뭐건 갑자기 대뜸 내 편을 들어주는게 웃겨서 지금 친구랑 말하고 있나 싶었다.
애매하게 구는 사람, 혼자 엑셀 밟는 사람, 자기한테 번호 물어보는 사람 많다면서(?) 인기가 많다는 식으로 말하지만(안 물어봤다, 내가 그 사람 번호 물어본게 아니다) 처절한 자존감의 바닥을 보이는 사람도 말고. ("어머, 인기가 많은가보다! 빨리 쟁취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기는 커녕 그냥 웃겼다.)
다 적고 보니 나에겐 소중한 것이 이미 있는데 굳이 다가온다고, 그냥 기회가 왔다고 연애 상대를 물색해야하나...?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그냥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에너지가 되니까(무슨 슈가슈가룬 세계관도 아니고....) 같은 어정쩡한 마음으로 임할 일이 아니다. 속도 차이가 있다면 대화로 풀어나가고,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지보다 내 마음이 어떤지 보고, 애매함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끊어내면 그만이다.
인생의 목표와 꿈에 가까워지기 위해 전력투구 하는 것.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일을 연마하는 것. 이게 회사나 연애 같은 것보다 지금의 나에게, 그리고 아마 앞으로의 나에게도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걸 정리했다. 눈 앞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싹 걷힌 것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물론, 나는 인간이니까 구직에서 탈락하거나 괜찮은 줄 알았던 데이트 상대가 실망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면 다시 땅바닥을 기어다니겠지. 근데 다음번엔 그 시간이 더욱 짧아질 것이다. 내가 원하는게 뭔지 알고, 내 가치를 스스로가 인정하고,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한 기준과 방식을 똑바로 인지하고 있을 때는 절대로 전처럼 무너질 수 없다.
민망할 정도로 "너는 짱이고, 너는 아름답고, 너는 똑똑하고, 너는 재밌고, 너는 강인하다."라는 걸 농담처럼 읊으며 퀸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의 인스타 쇼츠를 봤다. 인스타 쇼츠의 효능은 이런 것이구나. 짧은 쇼츠에서 보여주는 이 사람들의 단편적인 삶의 태도가 나에게 좋은 의미에서 전염되는걸 보면서 가볍게 가볍게 살아가는 일을 배웠다.
** 현실과 이상의 균형을 맞추려는 사람이라는 말이 가장 정확하고 예리하게 느껴졌다. 청소년기에는 이상과 환상 밖에 없었고, 10대 후반부터 30대까지의 여정은 현실에 뿌리내리는 동시에 이상에도 가까워지려고 손을 뻗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