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비스스ㅅ소 pulvissso

소정, 소중, 소융, 정소

  • 소융의 경우-

현지 시각 오후 11시 50분. 어딘가에 몸을 뉘일 것만을 상상하며 중력과 씨름하며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피곤한 얼굴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공항. 새하얀 느낌의 공항 출구 쪽에는 이름을 띄운 휴대폰을 든 사람들이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고 있다. 저기에 내 이름은 없을 것이다. 공항 건물 바깥으로 나가면 예약해 둔 택시가 있겠지 싶어서 그들을 지나쳐 공항을 나선다. 11월 늦은 밤의 칼바람이 뺨을 후려치고, 눈발이 방향 없이 이리저리 날리고 있다.

택시 기사를 찾아 헤매며 공항 바깥을 빙빙 돌지만 내가 예약한 차량 번호와 똑같은 택시는 보이지 않는다. 칠칠삼구. 칠칠삼구. 칠칠삼구. 그저 빨리 숙소에 몸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몸은 언제라도 중력에 굴복할 준비가 되어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정신력을 붙잡는다. 밤 12시가 넘었고, 주변은 어둡고, 피곤하고 파리한 인상의 사람들만이 공항에 남아 있다. 지금 나를 도울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집에, 아니 숙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한다.

"세븐! 세븐! 쓰리! 나인!"

어딘가에 있을 택시 기사가 이 소리를 듣길 간절히 속으로 빌며 소리쳤다. 소리칠 때마다 찬바람이 열린 입을 통해 목과 폐로 들어온다. 땡땡 얼어붙은 몸으로 한 번 더 소리친다.

"세븐! 세븐! 쓰리! 나인! 세븐..."

지금 얼마나 이상해보일까. 그리고 소리칠수록 더 추워진다. 예약한 택시와 같은 운수회사의 택시가 보인다. 앞자리에는 택시 기사가 앉아서 휴대폰으로 뭔갈 보고 있다. 지금 얼마나 처량해보일까. 잠깐 생각하고는 그 택시의 유리창을 두드린다.

혹시 저를 도와주실수 있나요. 혹시 영어를 하시나요. 어플로 택시를 예약했었는데, 그 택시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목이 잠기거나 갈라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추위로 떨리는 턱을 최대한 덜 움직이며 말한다.

택시 기사는 예약한 택시 번호를 묻고 혹시 공항 안에서 그를 보지 못했는지 묻는다. 아까 사람들 이름을 들고 서성이던 사람들이 택시 기사들인 모양이었다. 늦은 밤에만 그런건지, 아니면 이곳에서는 예약한 사람을 찾기 위해 그러는게 당연한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택시 기사는 같이 공항 안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자기가 내 택시 기사를 찾도록 도와주겠노라고 말한다. 분명 일평생을, 아니 몇 십 년을, 아니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엔 충분히 이곳에서 오래 산 사람 특유의 확신에 찬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그가 앞장선다. 어쨌든 뭔가가 해결될 거라는 믿음이, 적어도 이 세상에서 내가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아는 사람이 나 자신 말고 하나 늘었다. 앞장서는 그를 따라 창백한 빛이 삐죽빼죽 새어 나오는 공항에 들어간다.

그가 휴대폰을 들고 출구 쪽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몇 마디 나눈다. 아마 택시 기사 동료들일 것이다. 두리번거리고 휴대폰을 몇 번 두드리더니 영어로 '저기 있다!' 라고 외친다.

"아 유 소융?"

어디선가 나타난 나의 택시 기사가 묻는다. 소융? 소융. 예스, 예스. 아이 엠 소융. 이 나라 언어의 발음으로는 소융이란걸 기억해낸다. 나를 택시 기사에게로 인도해준 또 다른 택시 기사에게 너무너무 고맙고 덕분에 살았다고 말한다. 빠르게 달리는 택시 안에서 바라본 바깥은 깜깜하고 나무가 있는 도로라는 것만 겨우 알아볼 수 있다. 바깥이 깜깜해도 나에게는 탈 택시가 있고, 들어갈 집이 있다. 그럼 잠깐 동안 빛 안에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