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비스스ㅅ소 pulvissso

회고와 나이듦과 비겁함과 기타등등

딱히 그러자고 약속한 적은 없지만 언제부턴가 매년 연말에 만나 한해를 돌아보고 같이 네 컷 사진을 찍는 친구가 있다. 네 컷 사진 속 우리는 거의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인생의 변곡점과 고난과 기쁨의 순간을 기억해주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따뜻한 일이구나 매년 느끼게 만드는 감사한 인연이다. 친구가 선물해준 귀여운 고양이 자석을 냉장고에 붙이고 같이 찍은 올해의 사진을 작년 사진 옆에 붙였다.

2024년을 오로지 금전을 기준으로 알게 모르게 돌아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스스로를 칭찬해주기 위해서 착즙하며 돌아보니, 1월부터 꾸준히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새로운 영향도 많이 받았고 재밌게 살아보려고 이런저런 시도들을 했다.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서 시도해봤던 것들 대부분을 성취했다. 그런데 오직 돈이 안된다(그것도 월급쟁이 시절 기준으로)는 이유로 올 한해가 참 안풀렸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잘 풀렸던 시기가 아니긴 하지만, 굳이 다시 이름을 붙이자면 새출발을 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을 재점검하는 시기라고 불러주고 싶다.

이제 결코 어리다고 할 수는 없는 나이인데, 친구와 나이듦에 따른 변화를 자연스레 얘기했다.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준다, 모든 건 때가 있다, 이런 말들을 코웃음치며 어이없게 여기던 때가 있었는데 이런 말들이 피부로 절절하게 와닿는다. 얼마전 새치를 한 가닥 발견했고, 언제부턴가 커피를 마시면 잠이 잘 안온다. 하루에 커피를 3~4잔씩 마시지 않으면 집중할 수 없는 시간이 있었는데.

모 배우가 나이 먹으면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기도, 누군가의 마음을 받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조심스러워진다는 말을 했던게 기억난다. 점점 비겁해진다는 말이로군, 하고 넘겼던게 엊그제 같은데 굉장히 실감하게 되었다.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하면 설렘보다는 공포심이 먼저 들고, 누군가를 쉽게 좋아하게 되지도 않으며, 의미 없는 만남 같은 건 시간도 에너지도 아깝다는 생각만 든다. 서로 알아가는 단계에서 이 사람과는 이래서 오래 못 가겠군, 하고 덥석 맘속으로 진단을 내리는 일도 있다. 경험이 쌓인다는게 꼭 좋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다지 의미 없이 내다버린 시간과 에너지가 있었기에 알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 보고 싶었어요?" 라는 뻔뻔하고 다소 비겁한 나의 질문에(왜 비겁하냐면은, 그냥 보고 싶었다고 먼저 말하면 될 것을 굳이 상대의 입에서 먼저 듣겠다는 그 마음이) 천진난만하게 "응, 너무 보고 싶었어요."라고 답하는 사람의 솔직함은 아마 죽어다 깨어나도 내가 가질 수 없는 장점이겠지. 상대방이 나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거나 아니면 확신 같은게 없어도 상관없다는 그 솔직함은 참 쉽지 않은 것이다. 미련이나 좋아하는 감정이 사라진 뒤에도 이상하리만치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런 순간들이 있다.

헤어진 사람의 사진과 흔적은 재빨리 다 없애버렸으면서 그 사람이 키우는 고양이 사진은 오래도록 못 지웠던 적도 있다. 귀여워서. 고양이가 무슨 죄인가.

아무튼, 비겁함을 내려놓고 내 마음을 맘껏 표현할 수 있겠다 싶은 사람이 등장하면 서로에게 보고하기로 약속한 연말 만남이었다.

그저 건강하게, 겁먹지 말고 재미있게 살자, 비장하게 살지는 말자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