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여름 작성)
작디작은 두개골이 불타고 있었다. 직원분이 잘 불타라고 불길의 중앙으로 뼈를 모으기 위해 문을 열었고, 그 안에 불타는 작은 두개골이 보였다. 털과 가죽이 다 타버리고 뼈만 남은 나의 가족을 보면서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눈앞에서 개의 몸이 완전히 불에 타는 것을 보았고, 남은 뼈를 모아 빻은 유골함을 받아들면서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뼛가루는 한줌이었지만 뼈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묵직했다. 뼛가루를 공원 여기저기에 뿌리고 돌아오니 남은 것이 없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물리적으로 존재하던 어떤 개가 하루아침 사이에 내 눈에 보이지 않고 내 손에 닿지 않는다.
모든 이별은 갑작스럽다. 정확한 때를 알고 있는 이별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준비가 되는 때란 절대 오지 않는다.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더라도 언제나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으로 갑작스럽다.
더 이상의 연명 치료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의사가 나에게 개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작별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한다. 마지막은 병원에 입원해서 홀로 고통을 견디기 보다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편이 개에게 더 좋을 거라 말한다. 연명 치료를 하지 않으면 너무 쉽게 포기해버리는 것 같아서 치료를 붙잡고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더 같은 세상에 있고 싶었는데, 한 편으로는 짧은 면회 시간이 끝날 때마다 끙끙거리던 개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떠오른다.
체온이 떨어지고 있다며 담요로 몸을 둘둘 감은 개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와 엉엉 운다. 개를 가운데에 뉘이고 엄마와 양쪽에 눕는다. 아늑한 조명을 틀고 마음이 편해지는 음악을 연달아 재생한다. 개는 그동안 못 받은 것을 이자까지 쳐서 받아내겠다는 기세로 쓰다듬으라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중에도 우리를 툭툭 친다. 엄마와 나의 손은 잠시도 멈출 새가 없다. 이상하고 다정하고 슬프고 느린, 짧은 유예의 시간이 우리 셋 사이에 흐른다. 내가 눈을 감지 않으면 개도 눈을 감지 않는다. 눈을 감고 자는 척하다가 깜빡 잠이 든다. 시선을 느껴 눈을 뜨니 개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그런 것처럼 마지막으로 모습을 꼼꼼히 마음속에 저장하려고 하는 걸까.
이불에 누워 있으면 파고들던 개의 자리가 비어있다. 이불 근처를 살금살금 걸어 다니는 습관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불 속에 있는 무언가를 실수로 툭 찬다. 깜짝 놀라서 이불을 들춰보면 휴대폰이나 책이다. 쓰다듬으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
한영 번역 수업에서 선생님이 잘 쓰인 영어 문장의 예시를 들어주신다. 우리는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왜냐면 살아있다는 것은 엄청난 확률을 뚫고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게 바로 인상적인 첫 문장이라고 말씀하신다.
무너져 내린 성벽을 지나 고요한 들판을 걷는다. 텅 비어버린 보물 상자들과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게임을 완전히 마치기 전에 늘 하는 일이다. 최근에 출시된 게임들은 엔딩을 본 이후에도 마을이나 모험 장소들을 돌아다니며 NPC들과 대화를 나누고 에필로그처럼 그 이후의 이야기를 즐기는 것이 추세지만, 옛날에 나온 게임들은 영 그렇지 않았다. 활짝 열린 상태로 덩그러니 남겨진 보물 상자들이 이곳저곳에 있고, 주인공에게 중요한 사실을 전해주려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NPC들은 모습을 감췄다. (혹은 엔딩을 볼 수 있는 장소에서 “이제 준비 됐니?” 같은 소리를 하면서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하라고 종용한다.) 거대하고 사명감 넘치거나 나의 운명을 바꿀 모험이 끝이 났는데,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을 느낀다. 실력과 상관없이 거의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소설이나 영화와 달리, 게임은 없는 순발력까지 쥐어 짜내면서 이야기를 보기 위해 애를 써야한다. 몇 번이나 죽다가 살아나기도 했고 그때 고른 선택지가 맘에 들지 않아서 슬그머니 진행 상황을 뒤로 돌려 다른 선택을 하면서 지켜본 이야기다. 이제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세계는 치열하던 이야기 초반과는 전혀 다른 곳 같다.
Liminal Spaces라는 사람들이 없는 텅 빈 공간의 사진을 올리는 트위터 계정을 자주 본다. 텅 빈 미국식 다이너, 텅 빈 운동장, 텅 빈 학교 복도, 텅 빈 아파트, 늦은 저녁 위태로운 가로등 불빛 아래에 있는 텅 빈 전화 부스 등등. 이 계정에 올라오는 장소들의 공통점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사람도 고양이도 강아지도 그 무엇도. 이 계정의 사진들을 보면서 기묘한 기분을 느낀다. 슬프면서도 안정적이고, 고요하면서도 한때의 번잡함을 상상할 수 있다. 본래의 목적과 다르게 텅 비어버린 장소들은 어쩐지 이쪽 세상이 아니라 저쪽 세상 같다.
이사 준비를 하면서 내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짐을 싹 정리했다. 모든 물건들은 어떻게든 상자 안에 욱여넣을 수 있다. 이삿짐을 다 정리하고 텅 비어버린 집에서 “야호!”하고 소리를 지르면 평소보다 훨씬 큰 울림이 느껴진다. 그동안 내 물건들이 전부 내 소리를 흡수하면서 살았겠구나. 고운 말 좀 쓰면서 살걸. 여기에서 요리도 하고 누워서 잠도 자고 웃고 울었는데, 살았던 흔적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남아 있는 서류들을 제외하고 이 장소만 봤을 때는 누군가 여기서 살았을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저 천장 위에 남은, 내가 친구에게 북극곰 모양이라고 우긴 얼룩만이 나를 내려다 볼뿐이다.
개의 죽음 이후 비가 쏟아지는 어느 여름날 공원을 굳이 갔다.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릴 줄 몰랐고, 옷이나 우산이 쓸모를 다하지 못할 줄도 몰랐다. 육교 같은 다리의 계단을 오르고 걷고 내려가서 도달한 저편의 공원은 어쩐지 까마귀들이 우는 소리가 가득했다. 사람은 없었다. 까마귀 소리만 드높다. 비는 더욱 억수같이 쏟아지고 이쪽으로 가지도 못하고 저쪽으로 가지도 못한다. 산책이라기보다는 천연 샤워를 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은 몰골로 다시 다리를 건너 바깥으로 통하는 공원 입구쯤에 도착했다. 쏟아 붓는 비에 공원 입구에는 말 그대로 작은 호수가 생긴 상태였다. 발을 물속에 집어넣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 공원의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다. 잠깐 망설이다가 운동화 신은 발을 웅덩이에 담가버린다. 물살을 가르며 공원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공원에 들어오려던 이들이 웅덩이를 보고 돌아서 나간다. 웅덩이 건너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에 공원 입구를 돌아본다.
마지막 공연을 보기 위해 자리에 앉는다. 조명이 비추는 길을 먼지들이 천천히 유영한다. 조명이 비추고 배우가 움직이고 소품들이 놓인 무대를 바라본다. 모두가 무대를 집중해서 바라보고 공연이 끝나면 박수를 친다. 배우들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관객들은 퇴장한다. 모든 과정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흐른다. 마지막 공연이 끝나면 조명이 아닌 쨍한 전등이 켜진다.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무대를 뜯어서 옮긴다. 밧줄을 내려 조명을 철수하고 크고 작은 소품을 치우고 다시 아무것도 없던 상태로 돌아간다. 모든 과정은 효율적으로 이뤄진다. 불과 몇 시간 전에 펼쳐졌던 일들이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만들었다 허물어진 세상의 열기를 찾아보려고 빈 무대를 멍하니 쳐다본다.
꽤 오래 아르바이트를 했던 을지로의 한 가게가 재개발로 인해 영업을 종료한다는 소식을 봤다. 아르바이트를 그만 둔 이후에도 종종 찾아갔었고, 사장님과 산책을 하거나 술을 마시곤 했었다. 어느 날부터 가게 맞은편에 길게 공사용 가벽이 세워졌다. 풍경은 나날이 황량해져만 갔다. 결국 크리스마스가 마지막 영업일이 된 것이다. 마지막 날 파티에 가니 반가운 얼굴들이 가게 곳곳에 보였다. 거대한 무지개 깃발과 N번방 관련 스티커들, 페미니즘 관련 포스터들이 예전처럼 그 자리에서 나를 반긴다. 예전에 알바를 했을 때, 간혹 어떤 손님들은 들어오자마자 가게 내부를 한 번 훑어보고 도로 나갔었다. 나는 가게에 있는 깃발과 포스터들이 부적이라고 농담을 했었다. 주방 안쪽에는 역대 알바생들의 이름이 쭉 적혀있다. 곳곳에 남은 흔적을 눈으로 훑으며 이 공간이 철거된다는 사실을 소화해보려고 한다. 다정한 공간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걸 먹으며 웃고 떠든다. 의연하게 앉아 있다가 살아남아서 다시 만나자는 노래 가사를 듣고는 눈물이 핑 돈다.
Liminal Space가 무엇인지 느낌적인 느낌으로는 알겠는데 그 정의가 무엇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좀 오싹하고 좀 향수가 느껴지고 좀 그리운 그런 느낌적인 느낌인가. 구글에 리미널 스페이스를 검색해서 나온 문장을 게으르게 바로 구글 번역기에 복사 붙여넣기 한다.
한계 공간은 당신이 있었던 곳과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또는 은유적으로 가고 있는 곳 사이의 불확실한 전환입니다. 한계 공간에 있다는 것은 새로운 것의 벼랑에 있지만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liminal"이라는 단어는 문지방을 의미하는 라틴어 "limen"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애매모호한 경계의 상태라는 의미는 알겠는데,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진다.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곳에 도달하지 않고 계속 “한계 공간”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마음은 뭘까. 언제 준비가 되는걸까.
매 상담마다 죽은 개를 떠올리며 우는 나에게 상담 선생님은 과학 관련 방송에서 최근에 본 이야기를 말씀해주신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죽은 게 자연스러운 상태인데 살아있던 것이라고. 죽은 이후에 원자 상태로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계속 존재할거라고.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여전히 세상의 일부분인걸까.
이곳과 저곳이 무 자르듯이 나뉘는 게 아니고, 마치 아주 작은 가루들이 섞이듯 섞이지 않듯 모호하게 흐르고 있다면. 아주 작은 가루들이 계속 쌓이고 쌓여서 겹을 이루고 있다면. 그리고 그 모인 겹들과 계속 살아간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