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도 작성)
유년기를 떠올리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데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아이들에게 숫자 개념을 알려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형태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인지 숫자가 적힌 점들을 순서대로 이으면 완성되는 그림이 있다. 선을 그을 때는 어떤 그림이 완성될지, 1에서 2 정도의 숫자에서는 짐작하지 못한다. 그래서 곡선이 있어야 할 곳에 직선이 있고, 머뭇거리면서 불확실함을 느끼며 그은 선들은 본래의 형상과 달리 어쩐지 버석거린다. 선을 다 그으면 완성된 그림은 무엇인지 알 수는 있으나 본래의 형상이나 기대와는 사뭇 다르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 사람의 말을 하는 용들이 나온다. 용들은 아주 멋있고 지적인 존재로 묘사되지만 그들은 별 저항없이 인간들의 전쟁에 참여한다. 대충 비행선 같은 존재다. 인간들은 용들에게 안장을 채워 탑승하고, 용들의 위에서 서로에게 총을 쏘거나 적군의 배를 습격한다. 그 책에 아주 짧게 단역으로 나오는, 지능이 낮은 용이 말할 때만 “지껄인다.” 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중국어, 영어, 불어 삼개국어를 하는 용이 주인공인 책에서 지능이 낮은 용, 영어도 겨우 하는 용은 말하는 존재로 취급받지 못하는 것 같다. 얼마전 회의에서 말이 꼬여서 맘처럼 말하지 못한 순간이 떠오른다. 머릿속에 재빠르게 “소정이 지껄였다.”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타일러가 말하고, 오스틴이 말하고, 리나도 말하지만 소정은 지껄인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괜히 혼자 찔려서 팀에 합류한 초기에 말했다. 나에 대한 이런저런 것을 궁금해하는 팀원들에게 나는 아메리칸 코리안이나 뭐 그런게 아니라 그냥 코리안 코리안이라고, 아쉽지만 어학연수를 간 적도 없다고 말했다. 여전히 영어를 공부 중이며, 덕질이 나를 공부하게 했음을 말했다. 문득 내가 팀에서 유일한 아시안임을 깨닫고는 어쩐지 소화가 안되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도 뭐라하지 않았지만, 명치가 막히는 그런 느낌이 있다. 2개월인가 후에 같은 팀 엔지니어 부서에 다른 동양인이 입사한다. 사실 같은 동양인이라고 하기에 그는 인도계고 나는 동아시아 한국인이다. 게다가 그는 인도계 영국인이고 포쉬 악센트의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며, 사람들이 인도인의 영어를 떠올릴 때 으레 생각하는 그런 악센트가 전혀 없다. 그 사실이 어쩐지 나를 조금 괴롭게 한다. 굳이 혀를 굴려 말할 것도 없고, 어차피 영어는 이민자들의 언어나 다름이 없기에 나는 나의 언어로 말하면 된다지만 그들에겐 모어인 언어를 내가 구체적인 뉘앙스나 어감을 모른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공부를 해서 아는 것과 생활에서 축적되어 피부로 아는 것은 다르다.
물리적으로는 한국에 존재하고 시간적으로는 유럽 또는 미국에 존재하는 날이 많아졌다. 일이 끝나면 오후 10시가 넘는 날이 일주일에 3번 정도니까, 평일에 약속을 잡고 사람들을 만나는건 불가능하다. 나에게 주어진 뜬금없는 낮 시간대에 운동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PT를 받으러 가면 트레이너는 어쩐지 내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묻고 싶지만 묻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대충 사무직이라고 말했다. 낮 시간대의 헬스장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은퇴한 장년층이나 프리랜서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있다.
불안감은 내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을 하고 있을 때도 불시에 찾아온다. 책을 읽거나, 밥을 먹거나,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 중이거나, 산책을 할 때도 찾아온다. 지금 여기,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한다. 에에올을 보고 좋은 의미로 정신이 사나운 영화라고 했었지만 사실 내 머릿속의 사정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차 수업을 들으면서 냄새를 맡고, 맛을 음미하며 현재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선생님이 설명해주신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머릿속에 강렬하게 자리잡은 내용은 다소 뜬금이 없다. 대만의 차 농장에서 차를 볶으면서 기다리는 시간 동안 농부들이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이다. 노래방 기계까지 준비가 되어있어서 들춰보고 아직 때가 아니다 싶으면 노래를 몇 곡 부르고 다시 들춰본다는 사실이, 내가 마시는 차의 찻잎이 이런 과정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구나 생각하면 불안함이 조금 가신다.
4년간 극작을 배웠는데 극작법에 대해서 명확하게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이것뿐이다. 모든 ‘잘 팔리는’ 이야기에는 4-1 지점이 있다. 모든 게 잘 되어가는 줄 알았던 순간이 알고 보니 제일 망한 순간이며, 인물은 열리는 줄 알았던 문이 사실은 벽임을 알고 크게 절망한다. 같은 수업을 들었던 동기와 무료함을 느끼던 어느 날 소위 ‘대형’ 인기 영화들을 쭉 봤다. 새벽까지 보면서 우리는 4-1이 현실임을 알았다. 아니, 애시당초 4-1이 왜 4-1이더라? 기승전결이 아니라 1, 2, 3, 4, 5의 순서로 이야기의 흐름에 번호를 매기고, 5로 넘어갈락말락 아이고, 다 망해버렸네 하는 것이 바로 4-1이었다. 몬스터 주식회사, 매드맥스, 그 밖의 우리가 좋아하던 모든 이야기에는 4-1이 있었다. 사실 4-1은 반전의 다른 이름인 것 같았지만 4-1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드니까 4-1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한때 나는 서사적 완결성, 서사적 구조를 갖출 수 없는 이야기들에 크게 매료되었고 그런 이야기만 쓰겠다고 크게 다짐한 적도 있다. 사람의 인생이, 모두의 이야기가 그렇게 흡족하게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이야기로 다듬어질 수는 없다. 실제로 서사의 문법을 부수는 영화와 소설을 비롯한 이야기는 매우 많으며, 어라 이 영화 왜 여기서 끝나 또는 끝날 때가 됐는데 왜 안 끝나 하는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
어쩌면, 서사적 완결성을 가질 수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는 내 마음이, 극적인 완성도를 가진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방어기제가 아닌가 울적해지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각종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내던 나는 어디로 가버린걸까.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재미있는 이야기들에 마음을 빼앗긴 나는 어디로 가버린걸까.
언제부턴가 나는 4-1이 무한히 반복되는 어떤 시간에 갇힌 것 같다. 주인공은 극적인 사건이 생길 수 있는 행동에 나서지도 않고 그냥 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분명히 저기 어딘가에 선이 그어지길 기다리는 점들이 있지만 그들에게 숫자도 부여되지 않았고 뭘 어떻게 연결해주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냥 계속 노래방 기계로 노래를 부르거나 차를 마시거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다.
인생이 점과 점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럼 자동적으로 숫자를 이으면 완성되는 삐뚤빼뚤한 유년시절의 그림들이 생각난다. 내가 바라던 것들은, 사랑하던 것들은 오래된 괴담에서처럼 다른 방식으로 실현이 되었다. 점들이 만든 궤적은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지만 어쨌든 근접은 했다. 5는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고 내게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새로 쓰는 이야기에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도는 인물들이 나온다. 쓰는 사람이 억지로 어디에 밀어 넣어버린 느낌이 아닌, 자신이 움직여서 어느 자리에 가닿는 것이 꽤나 힘들다. 내 인생의 4-1도 해결이 안되는데, 내가 만들어낸 인물들이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은 욕심 같다. 4-1 이후는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야 하는 것인데, ****선은 어떤 방향으로건 그어져야만 형상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인데 나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견딜만한 불안감, 불편함이 벽으로 존재하는 세상에서. 어쩌면 잠시 유예 기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가능성들이 나를 숨막히게 하는지도 모른다. 어, 그런데 너무 많은 가능성들 앞에서 유예 기간을 가지는 인물들에 대해 써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