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비스스ㅅ소 pulvissso

마법천자문+유희왕 카드

전 직장 동료가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전에 동료끼리 수다를 떨면서 내 얘기를 했고, 그래서 무척이나 보고 싶어졌고, 잘 지내는지 궁금했다는 메시지였다. 내 생각을 해주고 연락을 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쓴 다음에 잘 지낸다고 써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그냥 I am doing okay. 라고 덧붙였다. 미국인 동료랑 일하면서 설령 딱히 그렇게까지 그렇지 않더라도 awesome, fantastic, wonderful을 남발했지만 그냥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건 뭘까, 생각해보면 다름 아닌 기대인 것 같다. 다음날 먹을 맛있는 음식이건, 좋은 소식이건, 뭐가 됐건 무언갈 기대해야지만 사람은 살아가는 것 같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힘이 점점 약해지는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봄 나물을 샀다. 돈나물, 세발나물, 냉이, 달래를 사서 부쳐 먹고 무쳐 먹고 비벼 먹었다.

무료 운세를 보는데 대체 내 생일의 뭘 보고 이런 운세가 나오는 건지 궁금해져서 '만세력'이라는 걸 알아봤다. 그러니까 나는 경금이고, 경인일주고, 대충 이런저런 것들의 조합이 이런 결과를 내는구나. 경금은 쇠라서 고생하며 단련되어야 하는데, 그 고생이 너무 강하면 단련이 되기 전에 녹아버릴 수도 있다.(고 한다.) 신약, 신강 개념까지 읽고 나니 이건 마법천자문과 유희왕 카드를 섞은 개념 같은 거구나 싶다. 경금은 신강해야 좋은데 나는 신약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디에 무슨 귀인이 있는데 무슨 글자 때문에 이 귀인이 힘을 못 쓴다고 한다. 유희왕 카드의 무효화, 무력화 그런 효과인가. 바위산에 사는 하얀 호랑이라는데 기백이 많이 죽은 호랑이가 상상됐다. 맞는 얘기, 안 맞는 얘기가 뒤섞인,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얘기들을 보다가 내가 왜 이걸 보고 있지? 라고 생각했다.

아닌 척하면서도 사람들은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하나보다.(일단 나는 그런 것 같다.) 해리포터 시리즈가 인기일 때는 어느 기숙사가 내 기숙사인지 테스트하고, MBTI 테스트를 하고, 무슨무슨 일주 이런 걸 보며 이들의 특징을 알아보고 싶어하는걸 보면. 경금인 유명인은 누가 있는지 보다가 기절할 뻔 했다. 한국 최악의 독재자들 대부분이 경금이라는 짜증나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연예인으로는 임시완과 한효주가 경인일주라고 한다. 정말 공통점도 감동도 없는 내용이다, 라고 짜증 내면서도 굳이 이걸 찾아본 내가 있다.

면접에서 희망 연봉이 아니라 전 직장 연봉을 물어보면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난감하다. 내 대답을 들은 상대방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십중팔구 좋은 말이 안 나온다. 한국 회사에 지원하면서 구인구직 사이트를 통해 자동으로 전 직장 연봉이 옆에 뜨는 걸 모르고, 그걸 삭제하지 않은 채로 지원서를 낸 걸 뒤늦게 알았다. 비밀로 할수록 좋은 정보는 삭제했어야 했는데. 어디 가서 말하면 죽창 맞을 얘기라 하진 않지만(일단 과거의 내가 제일 먼저 죽창을 날릴 거다), 고액의 연봉이었을수록 다음 직장을 찾기가 어렵다. 아마도.

솔직히 말하면 9500이라는 숫자가 내 것일 때는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꽤나 든든한 숫자였다.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 젊은 여자라고 은근히 무시하는 사람들, '그런 일 해서 돈 벌 수 있어요?'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 어차피 이름 들어도 모를 회사에 다니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을 속으로 무시하면서 '너보단 많이 버세요.' 같은 생각을 했다. 은근슬쩍 자기 연봉을 자랑하고 으스대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는 속으로 '나보다 적게 버네.' 하며 깔봤다. 아마 이런 모습들까지 포함해서 나 자신을 좋아하기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연봉을 자기 가치라 굳게 믿으며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면서도 나의 일부분은 이들과 비슷했다.

계층의 사다리를 착실히 올라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첫 회사 생활을 하며 대학에 다닐 때 반지하에서 자취했던 얘기를 꺼내니 경악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때 살고 있던 본가도 반지하라고 차마, 절대로 말하지 못했다. 유학을 다녀온 소위 '중산층' 동료들 사이에서 뭘 말해도 되고, 뭘 말하면 안되는지 점점 가늠했다.

창의성, 창작, 이런 걸 뒤로 했으니까 그 대신 얻는 게 있을거라 생각했다. 억을 500 정도 남겨둔 시점, 그리고 승진을 몇 개월 앞둔 시점, 그리고 그토록 살아보고 싶었던 나라로 비자를 받고 일하러 갈 수 있는 시점을 몇 개월 앞두고 동앗줄이 끊어졌다. 속물적인 생각을 해서 벌 받은 걸까. 자본주의 세상을 그렇게 욕했으면서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갈 생각을 해서 그런걸까. 경험이 남았고, (줄어가고 있지만) 돈이 남았고, 잃은 것 보다 가진 걸 생각해야한다. 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죽창으로 쿡쿡 찌른다.

구직하려면 역설적으로 빅테크 회사에 지원해야 한다. 1명을 뽑는 직무에 1000명이 넘게 지원하는 판국인데.

마법천자문과 유희왕 카드가 섞인 사주를 보다가 거푸집에서 흐물흐물거리는 도끼를 상상했다. 그만 징징거려야 한다. 가장 최선의 선택을 카드놀이 하듯이 정리하고, 실행하고, 안 되면 그다음을 또 도모해야 한다.

회사에 들어가려는 내 선택이 맞는 걸까? 내 상상력이 후져진 걸까? 회사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먹고 살길이 있는 걸까? 환율이 난리 났다는데 유학을 고려해 봐야 하나? 기회 비용이 너무 크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냥 매일 산책하고 봄나물이나 먹으면서 살고 싶어진다. 근데 또 자기효능감을 느끼고 싶다. 좋은, 강한 유희왕 카드를 손에 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