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사는 방법이 뭔지 모르겠다. 내 탓을 하고 나를 미워하는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해. 남이 아무리 나를 미워해도 내가 나를 미워할 때의 마음은 이길 수 없다.
첫 번째는 회사가 비자 지원을 해준다고 했다가 그 회사에서 정리해고가 시작되면서 내 비자 지원을 못 해줘서. 두 번째는 그냥 잠수. 세 번째는 혼자 김칫국을 알게 모르게 한 사발 들이켜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 다음에 탈락.
기대가 뭐가 나빠?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무얼 하며 살아가겠어? 그렇지만 한껏 부풀어 올랐던 가능성의 세계가 팡, 터진 뒤에 끈적하고 기분 나쁘게 달라붙은 과거의 마음이 남아있는 현실은. 끈적하게 달라붙은 것들 때문에 두 배로 힘들어진다.
기존 직원들이 장기 유학 경험이 있거나 한국계 외국인인 곳인데 그래도 최종까지 간 거면 잘한 거잖아. 그치만 합격할 정도로는 잘하지 않았다는 거지. 언제까지 가성비 인간으로 살래, 유학 좀 가라. 영어 말하기 연습 좀 더 열심히 하지 그랬냐. 언제까지 이렇게 어정쩡하게 있을래. 큰 걸 바라면 크게 노력했어야지. 그게 충분하지 않다고는 생각 안 해봤어?
불안이 사실은 기우였고 그냥 내 머리가 만들어낸 착각이라는 걸 아는 경험이 쌓여야 하는데 불안은 그냥 불안인 채로, 불안이 현실이 되는 걸로 나를 괴롭힌다. 그러면 불안이라기 보다는 촉인걸까?
사람 리크루터가 보내는 메일이 아닌 봇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탈락을 알리는 메일. 피드백이고 뭐고 없는, No reply라고 적힌 메일. 내가 그렇게까지 별로였나? 이게 아주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구질구질하게 만든다.
원치 않는 일을 마주했을 때의 끔찍함은 이런 것이다. 잠들기 전에는 계속 깨어있으면 무언가 변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고, 잠들었다가 일어날 때는 내가 아는 현실이 그대로라는 것에 다시 한번 절망하는 것.
가능성이 남아있을 때로 돌아가고 싶다. 아직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다. 서류에서 바로 탈락하는 것보다 몇 번의 면접을 거친 다음에 떨궈지는 게 더 기분이 드럽다. 더 진이 빠진다. 괜찮기는 개뿔. 의연하게 마주하기는 개뿔. 그럴 리가 없잖아 과거의 나야~!
모든 의욕이 사라져도 내일 다시 눈을 떠야 하고 살아가야 한다니. 일시 멈춤 버튼이 없다니. 스스로를 먹여 살리고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어제 오늘 내일만 울적해하다가 다시 털고 일어나야지. 별 수 있나.
징글징글하다. 뭔진 모르지만 이제 그만하고 싶다. 아니지. 그 회사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은 이때뿐이다. 여기 아니어도 돈 벌 수 있는 곳, 방식은 많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니까 기분이 더러운 건 당연하다. 제발 그냥 믿어주면 안 될까? 그냥 기대하면서 살아가면 안 될까?
이럴 때 스스로를 일으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있다. 불과 두 달 전을 생각해 봅시다. 이 회사의 존재를 알았나요? 이 회사에서 일할 가능성이 느껴졌나요? 아니요. 그때 특별히 불행하거나 불안했나요? 아니요. 그럼 그냥 이때의 본인을 불러오고 적당히 스스로와 화해하면서 끈적이들을 말려버립시다. 뭐 인생에서 안지 오래되지도 않은 회사 때문에 그렇게까지 우울해합니까. 뭐가 또 올 텐데요. 그때를 위해 에너지를 비축해 둡시다. 가지고 있는 것들이 녹슬지 않도록 반짝반짝 닦아둡시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기대감으로 가득하던 때보다 더 과거의 마음을 불러와야죠. 그 마음으로 기대감으로 가득 찼던 과거의 마음을 희석시킵시다. 대걸레로 몇 번 박박 밀면 치울 수 있는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