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의 마지막 날이다. 매해 연말이 되었다고 별다른 느낌이 드는 건 아니지만, 올해는 유독 흉흉한 소식이 끊이질 않는다.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과 맛있는 걸 나눠먹고 좋아하는걸 얘기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것 만으로는 일상이 채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삶에서 투쟁을 빼놓을 수가 없었다.
크리스마스의 여운과 새해의 설렘 사이에 끼어있는 생일이라 학창 시절부터 유독 잊히기 쉬운 날짜라고 생각했는데 매년 축하해주는 이들이 있다.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하고 나를 생각해서 고른 선물들을 받아보고 내 하루의 안녕을 빌어주는 메시지를 받는 건 매해 감사한 일이다. 생일은 괜히 특별하게 보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고 생각이 많아지는데, 연락을 받을 때마다 마음의 무게가 덜어지고 나도 상대방에게 좋은 인연이 되어야지 다짐하게 된다. 왁자지껄하게 보내거나 조촐하게 보내거나 조용하게 보내거나 매해 생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내년이 되면 올해 생일에 뭘 했는지도 까먹을 것 같다. 그런데 받은 생일 축하 연락은 잊어버리지 않는다. 감사한 인연들을 꼭꼭 기억하며 나도 이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한다. 세상도 삶도 언제든 끝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아낄 시간 따위 없다.
올해는 연말에 감사한 제안으로 이런저런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이 기회로 생긴 수입을 연말 기부로 사용했다. 월급 생활자일 때보다 기부 금액은 줄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으로 즐기면서(물론 기쁨과 동시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기쁜 어려움이라 칭하겠다.) 번 돈을 기부하는건 마음을 충만해지게 하는 경험이구나 느꼈다. 하나 남은 마감을 잘 마무리 하고 그 수입은 또 어떻게 알차게 쓸지 궁리해봐야겠다. 글쓰기와 연기(?)로 번 돈을 기부 이외에는 2025년 다이어리를 사는데 썼다. 편지지도 샀다. 누군가에게 실물 편지를 쓴지 꽤 오래되었는데, 어쩐지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편지는 진심이 묵직하게 담긴 것이란 생각이 들고, 받는 이에게 짐이 될까봐 언제부턴가 멀리 했었는데 그냥 편지를 쓰고 싶어졌을때 쓰기 위해 편지지를 샀다. 우리의 일상에는 진심과 보살핌이 더 필요한 것 같아서.
나는 너를 사랑할거야. 때로 오해하거나 미워할 수도 있지만, 너를 사랑하는건 멈추지 않을거야. 왜냐하면 나는 너를 아니까. 네가 누군지 아니까. 좋아하는건 안 좋아하기가 쉬울지라도 사랑은 그렇게 쉽게 멈춰지는게 아니야. '사랑한다'는 '좋아한다'보다 품이 넓은 마음이라서, '좋아한다'를 포함하는 더 큰 마음이라서 너를 사랑하는거야. 얼마 전 통화로 근황을 나눈 친구에게, 흉흉한 소식을 나누고 대화를 나눈 친구에게 느낀 감정이다. 꽤 오래전 다툼이 있었을 때 '네가 나를 미워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나도 너를 미워하려고 했어.' 같은 말을 들었는데, 첫번째로는 그런 마음을 느끼게 해서 죄책감이 들었고. 둘째로는 함께 헤쳐온 세월과 고통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널 미워하니, 라는 생각이었다. 너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네가 일일이 너를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너를 알고, 너를 더 알려고 할 것이고, 네게 생긴 새로운 좋은 소식들에 기뻐할거야. 함부로 실망하지 않을거야. 너를 향한 사랑을 멈추거나 하지 않아.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자주 연락하지 못하더라도 그래.
친구에게는 이런 마음을 약간 축약해서 전했지만, 아무튼. 우리가 서로의 시절을 기억한다는 것에 감사하고, 위로 받고, 친구의 존재에 다시 감사한다. 세상을 떠난 친구들도 언제나 기억할 것이고, 언제나 사랑할 것이다. 그걸 위해 태어났다고 느낀다. 기억하고 같이 살기 위해.
영화에 관한 짧은 글을 우다다 썼는데, 아마 1월이나 2월쯤 공개될 것 같다. 담당한 영화 중에 애도와 위로, 상실에 관한 작품이 많아서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며 공명하는 글을 쓸 수 있었다. 한 두달이 지나서 내가 쓴 글을 다시 마주하면 어떤 느낌이 들까.
일단은, 마지막으로 남은 마감이 조금 미뤄져서 안도했지만 그걸 잘 마무리 하는 게 1월 초의 우선 과제다.
2024년은 내가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이것저것 두드려 봤다. 2025년에는 본받고 싶은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이나 커리어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보고, 내 길을 구체적으로 가려면 뭘 할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할 것이다. '돈을 잘 버는 나' 또는 'IT 기업에 다니는 나'를 내려놓지 못해서 고통받았던 시간을 뒤로 하고, 진심을 다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다. 유튜브나 기타 SNS에서 대기업에 다니는 내가 돌연 퇴사한 이유?! 이런 영상이 많은데 알고보면 많은 이들이 소위 비빌 언덕...이 있다. 내 비빌 언덕은 나라서, 금전적인 것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겁먹지 않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찾고 추구하는 일에 소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을 믿고, 용기를 가득 채우고, 짧은 인생 재밌게 살아야지. 도울 수 있는 곳, 함께 할 수 있는 곳에 가는 걸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는 불안을 동반하므로 이 불안함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회사에 속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어디로든 가고 있다는 안도감에 나를 맡기는 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뤄보겠다.
영화에서 도망쳤는데 영화로 다시 돌아간다, 는 선택지가 어이없었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걸 안 좋아한다고 할 수도 없다. 지인분께 이런 얘길 털어놨더니, "역시 사람은 좋아하는 걸로 언제든 어떻게든 돌아가나봐요." 라고 말씀하셨다. 안되겠다 싶어서 도망쳤던 것이 다시 좋아질 수도 있구나. 그런거구나. 마음을 외면하지 말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연말이었다. 다시는 안 돌아갈거라고, 안 좋아할거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없구나.
습관적으로 무료 운세 사이트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금전운, 직업운, 사업운, 연애운, 총운을 두루두루 읽어봤다. 저마다 하는 말이 다르다. 어디서는 주변인들의 말보다 스스로를 믿으라고 하고, 어디서는 귀인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자신을 낮추면 잘 보낼 수 있는 한 해라고 한다. 어디서는 윗사람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거라고 하고 어디서는 직장에서 사랑받을 거라고 한다. 어디서는 돈을 벌 기회가 많은 거라고 하고, 어디서는 가진 돈을 지키는데 집중하라고 한다. 어디서는 올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사람이 다가올 것이라고 하고, 어디서는 막상 연애를 시작해도 바쁜 일들 때문에 상대방을 섭섭하게 만들 거라고 한다. 이것들 중 그 무엇도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니 그냥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되겠지, 맘대로 생각한다. 운세를 믿기 보다는 그냥 근시일 내에 일어날 좋은 일을 미리 알고 그때까지 죽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보고 싶은 것 같다.
시간이 1년 단위로 딱 나뉘지 않는다. 시간은 유기적으로 흐르고 올해 일은 내년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작년의 일은 올해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래도, 내년이 모두에게 위로와 평안과 연대를 가져다주길 바란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