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비스스ㅅ소 pulvissso

직업과 회사 관련된 모든 것을 빼고 너를 소개해 봐

직업과 회사 관련된 모든 걸 빼고 너를 소개해 봐. 직업 이름이나 회사는 너에 대해 많은 걸 말해주지 않잖아.

늘 생각하던 주제인데 이 질문을 최종 구직 면접에서 첫 질문으로 들으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구직 면접에서 하는 모든 말은 간결하고 핵심이 있으며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하거늘. 나는... 나는.... 속으로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가지만 그중에 나를 설명해 줄 무언가가 있을까?

영화 보는 걸 좋아해서 영화제를 많이 돌아다녔고, 영화 리뷰 쓰는 걸 좋아한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까 소재가 고갈되고 말았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최후의 수단. 최대한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곤란하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하기. 미안해. 나 너무 긴장했어.

다행히 면접관은 같이 활짝 웃어주면서 네 마음 안다고, 나도 아직 직업 관련된 모든 걸 빼고 내가 누구인지 고민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게 이 사람의 스킬인지 뭔지, 대화하면서 어느새 자연스럽게 내 얘기를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많은 질문을 받았다. 제일 좋아하는 게임 3개를 소개해 봐, 요새 본 것 중에 추천할 만한 영화 있니, 최근 게임 트렌드 중에 네 마음에 가장 드는 건 뭐니, 비거니즘이 한국에서 점점 확산되는거 같니, 과제랑 면접 등을 거치면서 느낀 이 직무의 중요한 부분이랑 이 회사가 뭐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등등.

APAC 디렉터의 질문이 끝나자, HR 매니저가 질문을 시작한다. 이 직업의 신나지 않는 부분을 말해볼까 해. 가끔 네가 다뤄야 하는 주제들은 무거운 주제가 될 수도 있어. 전 세계의 트렌드라는 건, 핫 토픽이라는건 예를 들자면 때로는 우크라이나가 겪고 있는 끔찍한 일들이 될 수도 있고 정치적으로 네가 동의하지 않는 상황일 수도 있어. 가끔이긴 하지만 이런 주제를 다룰 마음의 준비가 되었니?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전 직장에서 민감한 콘텐츠들을 다뤘던 경험을 공유했다. 그리고 모 게임 회사의 프로모션 비디오에서 아주 짧은 순간 스쳐지나갔던 손가락 제스쳐가 한국에서 논란이 되었고, 누군가가 공격받았고, 이 소식을 한국 게임업계 트렌드로서 회사 팀원들과 공유했던 경험을 얘기했다.

민감한 주제를 다룬다는 건 계속해서 공부해야 한다는 거고, 나는 그 공부가 직업적인 부분 외에도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고 믿어. 이 말은 진심이었다. 정희진 선생님이 안다는 것은 고통받는 것이라고 했던 말은 20살 때부터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말이었다.

면접을 위해 준비했던 모의 질문들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에 더 흥미롭고 더 어려운 질문들을 받았다. 이 추운 날씨에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즐겁다고 생각했다. 회사 사람들과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정말 좋겠네. 정말.

주 5일, 7시간 정도를 보내야 한다면 나의 다음 직장은 그저 돈이 충족되는 게 아니라 나의 정신적인 부분까지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곳이기를 바랐다. 어쩌면 이곳이 그런 곳이 아닐까 기대하게 된다. 물론 떨어질 수도 있지만, 일단은 모든 과정이 어려우면서도 흥미로웠다. 이것만으로도 좋다.

고등학교 때 쓴 일기를 다시 읽어봤다. 거기에는 미래에 가지고 싶은 직업에 대한 소망이 적혀 있었다. "해외로 많이 출장을 다니고 싶다." 이 말을 다시 요새의 내가 할 법한 말로 번역(?) 해보자면,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직업이었으면 한다는 말이다. 새로운 시야를 가지게 해주는 직업이었으면 한다는 말이다. 그냥 돈이나 벌어가면 그만인 직업이 아니라 나를 계속 공부하고 배우게 하는 일. 직업적인 삶 이외에 인간적으로 나를 성장시켜 줄 수 있는 일. 직업 외적으로도 내게 좋은 영향을 주는 일. 나를 열려있게 해주는 일.

나는 최종 탈락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나의 이런 소망을 이뤄줄, 월급을 받으면서도 내가 나일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걸 확인했다. 나는 전업 창작자는 정신적으로 무리니까 이런 직장에 다니면서 창작도 했으면 참 좋겠는데. 욕심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하지만 일단은 마음을 비우자. 함께 하면 무진장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아요? 올해는 그냥 잘 놀면 되니까요.

여기에 탈락하면 올해는 진짜 어디에도 이력서 안 넣고 애쓰지 않고 푹 쉬면서 보낼거다. 진심이다. 나를 들들 볶지 않을거다. 암.